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7.15~ 1669.10.4)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이다

 

많은 사람들은 렘브란트의 자화상에 매혹되지만 그의 다른 작품 중에는 탕자의 귀환이란 동일한 주제의 그림이 있다.

 

암스테르담 레이크스미술관에 있는 1636년의 에칭 작품에서

돌아온 아들은 아버지의 품에 안겨 두 손을 모아 회개와 간구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얼마나 급하게 뛰어나왔는지 아버지의 지팡이는 내 팽개쳐있고, 아버지의 오른쪽 신은 벗겨진 채 아들을 안고 있다.

하인은 신발과 겉옷을 챙겨 들고 뒤따르고, 창문 열고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보는 어두운 표정의 또 하나의 아들이 보인다.

렘브란트의 나이 30세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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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이 지난 1642년도의 드로잉이 남아있다.

아버지의 손등에 닿은 아들의 얼굴은 평온해 보인다.

어린아이처럼 그려진 또 다른 아들, 물끄러미 쳐다보는 표정과 몸짓은 집안의 자식 역시 탕자인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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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작품모두 뛰어난 작품이지만 이 작품은 아마도 그의 말년의 작품을 그리기 위한 습작처럼 여겨진다.

1962~1969 사이, 그의 말년에 그린 것으로 알려진 유화작품이 있다.

러시아 세인트 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에르미타즈궁 미술관에 걸린 이 그림은 높이가 2.4m 1.8m의 거대한 작품이다..

 

헨리 나우웬(Henri J.M. Nouwen)1983년 어느 날 우연히 복사판으로 된 이 그림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그는 중앙아메리카에서 자행되고 있는 폭력과 전쟁을 종식시키지 위해 크리스천 공동체들이 무엇이든 힘닿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누비는 고단한 순회강연을 마치고 막 돌아왔을 즈음이었다. 프랑스 트로즐리에 있는, 지적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따듯한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라르쉬(L'Arche) 공동체에서 몇 달 머물고 있던 중이었다. 하루는 공동체 안에 있던 친구의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방문에 붙여놓은 커다란 포스터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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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뜨거운 친밀감, 붉은 망토의 온화한 톤, 소년의 겉옷에서 반사되는 황금빛, 그리고 양쪽을 한꺼번에 휘감고 있는 신비로운 광채에 빨려 들어 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러시아로 달려가 에르미타즈궁 미술관에 걸려 있는 실제 그림을 보게 되고,

이 그림에 영감을 얻은 헨리 나우웬은 이 그림을 해석한 한 권의 책을 내야 할 정도였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자.

작은 아들의 비참한 모습에는 그 전의 그림 속 아들처럼 큰 변화가 없다.

누더기 옷에 낡은 신발은 오른쪽 발에 간신히 걸쳐있다.

집을 나설 때의 그 오만함의 흔적은 없고,

그의 머리는 죄인의 표징처럼, 아니면 어린아이처럼 숱이 없다.

그러나 아버지의 팔에 반사되는 그리 밝지 않는 빛을 통해 보이는 오른쪽 빰은 안도와 평온함이 엿보인다.

그의 안도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의 등을 감싸고 있는 아버지의 두 손이 보인다.

두 손은 마치 서로 다른 사람의 손처럼 부드러움과 투박함으로 다른 손으로 표현 되어져 있다.

 

헨리 나우웬은 서로 다른 두 손의 그림은 모성과 부성을 표현한다고도 했다.

그 안에 화해와 용서, 치유가 함께 담겨있다고 한다.

 

환한 빛 가운데 아버지의 용서를 받는 작은 아들의 여린 뒷모습과 반대로

어두운 화면 중에 첫째 아들이 보인다.

시선은 동생을 향하고 있지만 성실함으로 무장한 완고한 표정과 자세는 동생의 귀향을 반기지 못하고 있다.

 

그럼 아버지의 표정은 어떤가?

많은 비평가들은 아버지의 표정에서 사랑과 자비를 읽으라고 강요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얼굴에서 슬픔이 느껴진다.

 

기뻐하는 것도, 벅찬 감격이 표현되는 것도 아니다.

그의 감긴 눈에서 지쳐있는 아버지, 이제 안도하는 아버지가 보인다.

 

어떤 이는 아버지의 표정에서

늙은 비애라는 어구를 되새기게 된다고 했다.

돌아온 아들이나 집에 있는 아들이나 진심 어린 사랑을 받지 못해서는 아닐까,

큰아들의 순종은 있었으나, 또 작은 아들의 참회는 있었으나 늙은 아버지는 사랑 받지 못했기에 비애를 느끼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비애는 아들들을 사랑했으나 아들들에게 사랑 받지 못한 데에 있었다라고 표현했다.’

 

 

나우웬은 이 그림을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아버지는 집 나간 자식을 눈물로 기다리다가 눈이 짓물러 아버지의 눈은 초점이 없습니다.

시력을 상실한 노인, 이는 눈이 멀기까지 기다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줍니다.’

 

다시 이 그림을 천천히 살펴본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아들의 마음으로 어둠 속에 묻혀있는 하인의 마음으로…,

 

2012.6.16.